| 그러나 한의학의 새로운 진단체계를 구축하는 일은, 동양학의 근간에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동양학의 새로운 학문방법론 또한 같이 모색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집필 과정에서 당초의 기획의도를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차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론체계를 정리했다. 이것이 이 책의 이름을 ‘차서(次序)’ 라고 바꾸게 된 연유다. 2. 동양학은 한편으로는 우주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구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세치인(經世治人)을 학문적 목표와 가치로 삼는다. 동양학의 대표적인 해석틀 - 인식론과 실천론이자 학문적 방법론으로는 주자의 성즉리설(性卽理說)과 왕수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객관주의적 리학(理學)체계를 대표하고 후자는 주관주의적 심학(心學)체계를 대표한다. 양자는 『대학』 8조목의 하나인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 해석을 두고 여러 주장과 해석이 분분하지만, 어느 입장을 따르던 존재(我)와 세계(物)의 상대적 관점을 떠나 있지 못하며,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와 세계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실용하는 일반적인 가치체계로 끌어내지 못한다. 또한 8조목 자체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구도로 분절적 단계적으로 파악하거나 추상수준의 도덕적 실천론이나 경세치인의 학문적 방법론의 하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같은 해석방식은 한편으로는 수기안인(修己安人)과 경세치인(經世治人)의 학, 이를테면 인문학적 학문 방법론이나 도덕적 인식실천론에 경도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구명한다는 또 하나의 학문적 목표와 지향, 이를테면 사회과학, 자연과학에만 천착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양자의 편향성을 동시에 뛰어넘어서 전일적이고 통일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 여기에 ‘차서학’의 착안이 있다. 즉 한편으로 우주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구명하고 다른 한편으론 경세치인하는 주체로서의 인간발달의 문제를 전일적.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인식방법론으로서의 ‘차서학’의 착안이 있다. 3. 역(易)과 천지인물상응(天地人物相應)은 한의학의 대전제이다. 이는 한의학 이론의 전편을 흐르고 있는 기본 맥락이자 근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임상과 진단의 구체에서는 단편적인 진단과 처치로 일관하거나 대전제가 잊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한의학이 역(易)과 상응(相應)을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구두선에 그칠 뿐, 역과 상응을 망라하고 관통하는 의학체계와 임상의역 및 진단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단지 고전적인 음양오행 삼음삼양 오운육기론 등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기학체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의학적 대전제에 충실한 저술이라면 동무 이제마의 『격치고』와 『동의수세보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무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의원과 환자간의 오랜 친화성과 관찰을 전제로 한 것이며, 천기(天機)와 인사(人事)의 제한적 상응을 전제로 한 사상(四象)의 범주 내에서의 사람의 유형과 진단에 대한 고찰에 그치고 있다는 데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고방(古方)과 후세방(後世方)의 찬연한 원리론과 생리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경혈학 침구학 등의 치료법에 투철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다. 후세의 체질의학류가 이같은 미비점을 확충 보완하고 있다고 하나 임상적 유의성을 떠나서 그 합리적인 논거를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은 이상의 제반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차서-사람의 유형과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통합의학체계로서의 ‘차서의학’의 진단체계를 정리하고자 하였으며, 다소간 애초의 기획의도를 뛰어넘어 동양학의 새로운 방법론으로서의 ‘차서학’의 일단을 아울러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간 ‘차서메디칼’을 통해서 진행된 별도의 강의나 세미나 등에서 언급된 내용은 이 책에서 다시 정리하여 싣지 않았다. 이 점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2008년 5 월 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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